사르트르와 실존주의

분류없음 | 2008/09/01 00:09 | Jay

사르트르와 실존주의
(이후 Bold 체는, 개인적으로 공감하는 부분)


20 세기 지식인 역사에서 사르트르 만큼 대중에게 지속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사르트르의 지적활동이 연구실의 벽속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의 삶이 펼쳐지는 현장 구석구석으로 이어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동시에 외형적인 그의 다양한 변신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자유의 실현을 위해 투쟁한다는 기본적인 삶의 목표는 일관되게 지켜졌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광 범위한 사르트르의 지적편력을 짧은 글로 요약하는 것은 실존주의라는 말에 대한 정의 만큼이나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기본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최소한의 핵심적인 몇가지를 짚어보자면 우선 실존주의를 어떻게 규정할 것이냐,이에 따르는 필연적인 문제 즉 신의 존재 여부,그리고 20세기 현실역사에서의 이데올로기 문제 등등이 먼저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어 구체적인 20세기 역사에서 그는 어떤 행동방식을 취했는가를 살펴 보면 그에 대한 대강의 윤곽이 제한적이나마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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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팽개쳐진 존재’


다 양한 의미영역을 포괄하는 실존주의라는 용어는 실제 역사에서 무척이나 상이한 양상으로 시도되었으므로 한마디로 이것이 실존주의이다 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사르트르의 경우 한때 배운 바 있는 M.하이덱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하이덱거의 실존주의에서 그의 철학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덱거가 볼 때 인간의 존재에는 아무런 필연적인 근거가 없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내팽개쳐진 존재’ das geworfene Dasein 라는 말로 인간존재를 표현하였다. 인간은 이 우주공간에 그 어떤 기준이나 근거도 없이 우연하게 내팽개쳐진 존재라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무신론적 세계관은 바로 여기서 출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파악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런 껍데기도 씌워지지 않은 벌거벗은 상태 그대로의 인간의 모습,가장 헐벗은 상태로서의 인간의 모습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역사나 이데올로기나 어떤 체계에 의해 굴레가 덧씌워지지 않은 가장 원초적인 모습의 인간은 아무런 존재의 타당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존립근거가 없는 것이다. 이 우주공간에 아무런 이유없이 내팽개쳐졌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아무런 합목적적 이유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2.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


인 간존재의 무근거성은 사르트르의 무신론적 세계관에서 나온 것이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궁리를 거듭해보아도 신의 존재는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신의 존재여부는 그의 철학을 가늠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비교적 자세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 그의 무신론적 입장은 20세기 다른 지식인들과 대동소이한 이유에서 나온 결론이다. 가령 B.브레히트는 인간의 욕구에 의해 절대자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는 암시를 풍긴다. 어느 강연에서 청중이 브레히트에게 물었다. 신이 존재하는 것이냐고. 이에 대해 브레히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 대답을 듣기 전에 먼저 생각해보시오. 내 대답여하에 따라 당신의 생각이 달라지는가 아닌가. 만약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 질문은 불필요한 것이요. 그리고 내 대답 여하에 따라 당신의 생각이 달라진다면 이미 당신은 신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요.”

 

무신론적 입장의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는 자신의 간호사와 결혼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 결혼은 정신적인 결합일 뿐이었다. 그의 부인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이것을 호킹은 견딜 수 없었다. 왜 냐하면 자신의 물리학적 세계관으로 볼 때 신이 존재한다는 상상은 도저이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성서는 지구를 중심으로 쓰여졌다. 그것도 물리학적인 지식이 원시인과 다를 바 없을 때 쓰여진 것이다. 현대인의 상식으로 본다면 지구는 태양계에 비하면 먼지 만한 크기도 안된다. 그리고 태양계는 그 보다 큰 단위인 은하계에 비하면 먼지도 안된다. 현대물리학에서는 은하계가 50억개가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니 그런 우주에서 지구의 인간 하나하나를 주재하는 신이 존재한다는 상상은 할 수 없다는 것이 호킹 박사의 생각이었고 아무리 정신적이고 형식적인 결혼이라지만 그의 양심은 결혼생활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신의 존재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당신이 먼저 신의 개념을 설명한다면 답하겠다.”라고.


가 령 흔히 쓰는 말 중에 ‘천지’라는 말이 있는데 물리학적인 관점에서 이 말은 전혀 어울리는 표현이 아니다. ‘상하’,‘좌우’,남여‘,’주야‘같은 말들처럼 당연한 짝으로 사용되지만 이것은 마치 바닷물과 접싯물을 한쌍으로 결합시킨 것 만큼이나 어처구니 없는 표현이다. 그만큼 지구는 우주에서 미약하고 초라한 것이다. 이런 전제에서 사르트르는 신의 존재를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존재는 아무 근거가 없는 우연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존재와 본질 문제가 제기된다. 사르트르는 종이칼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즉 종이칼은 그 용도를 미리 염두에 두고 제작된 것이기 때문에 존재에 앞서 본질이 주어진다. 제작된 물건들은 모두 본질이 존재에 앞서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에 쓰려고 만든 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본질은 백지 상태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명제는 바로 ’인간의 존재(실존)가 본질에 앞선다.“는 말 속에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3. 공존 혹은 더불어 삶(Mitsein)  


사르트르가 초기에 천착한 문제는 정당화되지 않는 인간의 존재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철학서인 <존재와 무>는 바로 그와 같은 인간의 실존에서 필연적으로 타인과 더불어 살 수 밖에 없는 상황과 그에 대한 인간의식에 관한 것이었다. 더불어 사는 대상이 사물이라면 문제는 간단하다. 인간이 사물을 대상화시키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멋대로 사물에 대해 의미를 부여해도 사물은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물을 즉자화시키는 것이다. 화분 속의 꽃을 아름답다거나 거추장스럽다거나 불필요하다거나 심지어 추하다고 까지 보는 사람 관점에 따라 말할 수 있다. 어떤 의미부여를 해도 꽃은 반응이 없다. 그러나 대상이 인간인 경우에는 문제가 생긴다. 다시 말해 내가 타인을 사물처럼 즉자화 시키려 해도 상대방 역시 대자의식을 갖고 나를 즉자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존재와 무>는 이와 같은 타인과의 문제에서 생존하는 두가지 가능성을 분석한다. 하나는 나의 대자성을 밀고나가는 것이다. 상대를 사물처럼 대상화 시키고 즉자화 시키는 것이다.

다 른 하나는 나 자신을 사물처럼 즉자화 시키는 것이다. 이 두가지 가능성은 모두 실패로 끝난다. 의식을 지닌 인간을 즉자화 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재론적 여건은 타인의 지옥에서 투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드러나고 그에 대한 해결책 역시 인간 스스로 창조할 수 밖에 없다. <존재와 무>는 앞서 발표된 소설 <구토>에 대한 해설서의 성격으로 쓴 것이다.


소 설 <구토>에서는 관계와 목적성을 상실한 존재에 대한 감정이 표현되고 무질서한 존재들에 조화를 배열하려는 의도가 나타난다. 사물들과 사물화된 인간존재의 無償性에 구토를 느낀 주인공은 예술창조를 통해서 구원의 가능성을 보여주지만 구원에 대한 확신은 없이 단지 가능성으로만 끝난다. 이상 <구토>에서 <존재와 무>에 이르기까지 사르트르가 매달린 것이 인간의 실존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규명하려는 노력이었다면 전쟁을 체험한 이후에 사르트르는 집단속에서의 존재문제로 관심을 돌린다. 더불어 산다는 공존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공산당과 유착하는 계기를 가져다 준다. 당시 사르트르가 볼 때는 부르주와지가 인간의 자유를 위협하는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사르트르는 공산당과 속성이 달랐다. 그의 유물론은 근원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인식하는 실존주의를 기반으로 한 것이기도 했고 사르트르 자신이 후일 카뮈의 공격을 받았듯이 부르주아지 출신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4. 자유의 문제


인 간의 실존은 사물의 존재와 다르다. 사물은 실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처럼 미리 설정된 인간의 개념은 부정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은 그 존재에 대해 책임을 지울 대상이 없다. 인간 스스로 존재에 대해 책임을 지는 수 밖에 없다. 스스로 본질을 완성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바로 자유이다. 우연히 내팽개쳐진 존재에 의미를 부여해 나가는 과정,즉 본질을 채워나가는 과정에서 자유는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르트르가 역사의 변혁기 마다 노선을 바꾸고 개인이건 집단이건 끊임없이 적으로 돌리고 투쟁했지만 인간의 자유를 위협하는 세력과 맞서 싸워왔다는 입장은 일관된 것이었다. 그는 처음에 부르주아지를 자유에 대한 위협세력으로 여기고 공산당과 유대하여 싸웠지만 헝가리 자유화운동 이후에는 공산당과도 결별했다. 좌우 어느 진영에 소속되지 않은 채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권력과 싸웠다는 일관성을 그의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그가 주관한 잡지 <현대>에서도 자유의 문제에 대한 그의 끝없는 열정은 이어진다.

 

사 르트르는 철학적인 입장에서 저술활동을 시작했지만 자신의 철학을 설명하기 위한 방편으로 문학에도 상당한 정열을 기울였다. 그가 쓴 소설작품들은 예외없이 그의 세계관을 예술적인 기법으로 허구화한 것들이어서 그의 철학적 명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문학작업은 단순한 철학의 형상화가 아니라 문학 자체의 성과도 뛰어난 것이어서 비록 그 자신이 거절하긴 했지만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기에 이르렀다.


사 르트르의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물론 인간의 실존에 관한 것이다. 나아가 그 실존에서 인간의 자기실현을 위한 자유에 관한 것이다. 그가 사용한 ‘앙가지망의 문학’이란 바로 존재의 자유를 위협하는 세력과 맞서 싸우는 것을 말한다. <문학론>에서 사르트르는 문학의 목표를 자유실현이라고 말하는데 그 자유실현을 위해 하는 것이 바로 앙가지망(참여)문학이고  앙가지망이란 ‘자유라는 목적의 도시를 보여주는 순수성’과 직결된다.


<침묵의 공화국>에서는 극한상황에 처한 인간에게도 자유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처절한 고문과정에서 동지들에 대해 침묵할 수 있는 자유,전적인 고통속에서 전적으로 책임을 걸머지는 것,바로 이것이 자유의 실현이라는 것이다. 단편 <벽>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설정되고 있다. 지하 감방에 갇힌 주인공은 나찌 장교에게 불려나가 동지들의 아지트에 대해 발설할 것을 강요받는다. 주인공은 견디다 못해 엉뚱한 곳을 지목한다. 물론 인간존재의 우연성으로 인해 마침 그 시각에 주인공이 지목한 장소로 옮겨간 동지들은 체포되지만 그 고통의 극단상황에서 말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사르트르는 말한다. ‘어떤 극한상황에서도 자유는 있고 자유는 선택이며 선택은 전인류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스스로 걸머지는 것‘이라고. 바로 여기서 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는지가 밝혀진다. ’전인류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걸머진다‘는 것이 실존주의이기 때문이다.


스 스로 부르조아지 출신이면서도 기존질서에 끝까지 항거하며 좌우 이데올로기를 자유롭게 넘나들었고 일체의 제도적인 권위를 인정치 않으며 인간의 자유를 일관되게 지키려고 한 지식인은 그것도 서재속에 갇힌 게 아니라 삶의 현장을 거침없이 누비며 활동한 지식인은 아마 사르트르가 유일할 것이다. 

Bertrand Russell - 영국이 자랑하는 철학가. 노벨 문학상 수상자



Why I Am Not A Christian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by Bertrand Russell
버트란드 러셀
March 6, 1927
National Secular Society, South London branch
Battersea Town Hall
 
 

As your chairman has told you,
the subject about which I am to speak tonight is
"Why I Am Not a Christian."
사회자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오늘밤에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연설의 제목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Perhaps it would be as well, first of all,
to try to make out what one means by the word "Christian."
It is used these days in a very loose sense by a great many people.
먼저 ‘기독교인’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좋은 줄 압니다.
이 말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너무 소홀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Some people mean no more by it than a person
who attempts to live a good life.
In that sense I suppose there would be Christians of all sects and creeds;
but I do not think that is the proper sense of the word,
if only because it would imply that all the people who are not Christians
-- all the Buddhists, Confucians, Mohammedans, and so on --
are not trying to live a good life.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인이란
선량한 생활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라는 정도의 의미로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모든 종파와 교의에는 기독교도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말에 타당한 의미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기독교도가 아닌 모든 사람들,
즉 모든 불교나 유교나 회교를 믿는 사람들은
선량한 생활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뜻이 되어 버린다는
이유하나 만으로도 타당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I do not mean by a Christian any person
who tries to live decently according to his lights.
I think you must have a certain amount of definite belief
before you have a right to call yourself a Christian.
저는 기독교인들 자기의 주의에 따라
선량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기독교인이라 부를
권리를 주장하기에 앞서 여러분 자신이
어느 정도의 명확한 신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The word does not have quite such a full-blooded meaning now
as it had in the times of St. Augustine and St. Thomas Aquinas.
In those days, if a man said that he was a Christian,
it was known what he meant.
오늘날에 있어서는 이 말은
성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시대에 가지고 있었던 만큼
생기발랄한 의미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 시절에는 누군가가 ‘저 사람은 기독교도다’라고 말하면,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You accepted a whole collection of creeds
which were set out with great precision,
and every single syllable of those creeds you believed
with the whole strength of your convictions.
그 사람들은 매우 엄격하게 표현된 교의의 집성을 긍정했으며,
그 교의의 상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전면적인 확신을 가지고 믿었던 것입니다.
 
 
 
What Is A Christian?
기독교인이란 무엇인가 ?
 
Nowadays it is not quite that.
We have to be a little more vague in our meaning of Christianity.
I think, however, that there are two different items
which are essential to anyone calling himself a Christian.
The first is one of a dogmatic nature
-- namely, that you must believe in God and immortality.
If you do not believe in those two things,
I do not think you can properly call yourself a Christian.
Then, further than that, as the name implies,
you must have some kind of belief about Christ.
오늘날은 도저히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가 의미하는 기독교는 좀더 뜻이 막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려면
다음의 서로 다른 두 조항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교의적인 성질을 띤 것으로서,
하나님과 불멸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믿지 않는다면 자기를 기독교인이라고 정확히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름 그대로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The Mohammedans, for instance, also believe in God and immortality,
and yet they would not call themselves Christians.
I think that you must have at the very lowest the belief
that Christ was, if not divine, at least the best and very wisest of men.
If you are not going to believe that much about Christ,
I do not think you have any right to call yourself a Christian.
예를 들면 회교도들도 신과 불멸을 믿고 있지만,
회교도들은 자기를 기독교인이라고는 부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
무리 격하시키더라도 그리스도가 하느님은 아닐지 모르나,
적어도 '인간 중에서는 가장 선하고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다' 하는
신앙은 가지고 있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이만큼이라도 믿음도 없다면
나는 당신이 자신 스스로를 기독교도라고 부를 어떤 권리도 없다고 봅니다.
 
Of course, there is another sense,
which you find in "Whitaker's Almanack" and in geography books,
where the population of the world is said to be divided into Christians,
Mohammedans, Buddhists, fetish worshippers, and so on;
but in that sense we are all Christians.
The geography counts us all in,
but that is a purely geographical sense, which I suppose we can ignore.
물론 위테커 씨의 연감과 지리책에 있는 것과 같이
다른 관념도 있는데, 그것에 의하면, 이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도, 회교도, 불교도, 물신숭배자 등등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런 지리적 관념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가 기독교도입니다.
지리책은 우리를 전부 기독교도에 포함시키고 있으나
그것은 순전히 지리적인 의미에서이며, 이것은 무시해도 좋다고 봅니다.
 
Therefore I take it that when I tell you why I am not a Christian
I have to tell you two different things:
first, why I do not believe in God and in immortality;
and, secondly, why I do not think
that Christ was the very best and wisest of men,
although I grant him a very high degree of moral goodness.
But for the successful efforts of unbelievers in the past,
I could not take so elastic a definition of Christianity as that.
그러므로 ‘나는 왜 기독교도가 아닌가’를 설명함에 있어서,
저는 두 가지 다른 점을 들지 않으면 안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하느님과 불멸을 믿지 않으며,
둘째로 그리스도를 가장 높은 도덕적 선이라고 인정하면서도,
나는 왜 그리스도를 인간 중에서 가장 선량하며
현명한 사람으로 생각지 않는가를 말해야만 합니다.
과거에 비신자들의 성공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나는 이처럼 탄력성이 있는 기독교를 정의하지 못할 것입니다.
 
As I said before,
in the olden days it had a much more full-blooded sense.
For instance, it included the belief in hell.
Belief in eternal hell-fire was an essential item of Christian belief
until pretty recent times.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옛날의 기독교는 휠씬 생기발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그것은 지옥에 대한 믿음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원한 지옥의 유황불은 기독교 신앙의 한 본질적인 항목이었습니다.
 
In this country, as you know, it ceased to be an essential item
because of a decision of the Privy Council,
and from that decision the Archbishop of Canterbury
and the Archbishop of York dissented;
but in this country our religion is settled by Act of Parliament,
and therefore the Privy Council was able to override Their Graces
and Hell was no longer necessary to a Christian.
Consequently I shall not insist that a Christian must believe in hell.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 나라에서는 국왕의 자문기관인
추밀원의 결의로 더 이상 이 신조를 본질적인 것으로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캔터베리 대주교와 요크 대주교는 이 결의에 반대했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우리의 종교가 의회의 조례로써 결정되므로
추밀원은 양 주교를 무시할 수 있었고,
지옥은 더 이상 기독교도에서는 필요 없는 것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저는 기독교도가
지옥을 꼭 믿어야 한다고 주장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The Existence Of God
하나님의 존재 문제
 
To come to this question of the existence of God:
it is a large and serious question,
and if I were to attempt to deal with it in any adequate manner
I should have to keep you here until Kingdom Come,
so that you will have to excuse me
if I deal with it in a somewhat summary fashion.
하나님의 존재 문제에 이르면 이것은 중대한 문제가 됩니다.
또 만약 제가 이 문제를 적절한 방법으로 다루려고 한다면
내세가 올 때까지 저는 여러분을 이 자리에 머무르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제가 이 문제를 간결한 방식으로 다루어도
여러분은 저를 용서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You know, of course, that the Catholic Church has laid it down
as dogma that the existence of God can be proved by the unaided reason.
This is a somewhat curious dogma, but it is one of their dogmas.
They had to introduce it because at one time the freethinkers
adopted the habit of saying that there were such and such arguments
which mere reason might urge against the existence of God,
but of course they knew as a matter of faith that God did exist.
물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카톨릭 교회는 교의로서
하느님의 존재는 다른 도움을 빌지 않고 증명할 수 있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소 기묘한 교의이긴 하지만
어쨌든 카톨릭이 그것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이유는
한때 자유사상가들이 입버릇처럼 말해 왔던,
이성을 조금이라도 갖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존재를 논할 만한
이러이러한 증명법이 있다고 하는 습관에 젖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론 카톨릭 교회는 신앙의 문제로서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The arguments and reasons were set out at great length,
and the Catholic Church felt that they must stop it.
Therefore they laid it down as dogma
that the existence of God can be proved by the unaided reason
and they had to set up what they considered were arguments to prove it.
여러 가지 증명법과 이론들이 장황하게 발표되었으므로
카톨릭 교회는 그것을 막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가
다른 도움을 빌지 않는 이유로 증명할 수 있다고 단언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소위 그들의 증명법을 세웠습니다.
물론 그 증명법은 많지만, 저는 몇 가지만 들어보겠습니다.
 
 
The First Cause Argument
제 1원인에 의한 증명법
 
Perhaps the simplest and easiest to understand
is the argument of the First Cause.
(It is maintained that everything we see in the world has a cause,
and as you go back in the chain of causes further and further
you must come to a First Cause,
and to that First Cause you give the name of God.)
아마 가장 단순하고,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은
1원인에 의한 증명법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만물들은 다 원인이 있으며,
이 원인의 연쇄를 더듬어 올라가면 마침내 제 1원인에 도달하는데
이 원인을 하느님이라 이름한다.”
 
That argument, I suppose, does not carry much weight nowadays,
because, in the first place, cause is not quite what it used to be.
The philosophers and the men of science have got going on cause,
and it has not anything like the vitality it used to have;
but apart from that, you can see that the argument
that there must be a First Cause is one that cannot have any validity.
제가 보기에 이 증명법은 오늘날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첫째 원인도 옛날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철학자와 과학자들은 원인에 대하여 계속 연구해 보았으나,
그것은 옛날만큼 힘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제 1원인이 반드시 있으리라는 이 증명법은
아무런 타당성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I may say that when I was a young man
and was debating these questions very seriously in my mind,
I for a long time accepted the argument of the First Cause,
until one day, at the age of eighteen,
I read John Stuart Mill's autobiography, and I there found this sentence:
"My father taught me that the question
'Who made me?' cannot be answered,
since it immediately suggests the further question
"Who made god'" that very simple sentence showed me,
as I still think, the fallacy in the argument of the First Cause.
제 이야기를 해봅시다.
제가 젊어서 이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있었을 때,
저는 오랫동안 제 1원인에 의한 증명법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열 여덟 살 되던 어느 날
'존 스튜어트 밀' 의 자서전을 읽고 있다가 다음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즉 “아버님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시기를
‘누가 나를 만들었나’ 하는 문제는 대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곧 ‘누가 하나님을 만들었나’ 하는 문제를 가져오기 때문이다”라는 대목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이 지극히 간단한 문장은 제 1원인에 의한 증명법의 오류를 나에게 보여주었습니다.
 
If everything must have a cause, then God must have a cause.
If there can be anything without a cause,
it may just as well be the world as God,
so that there cannot be any validity in that argument.
It is exactly of the same nature as the Hindu's view,
that the world rested upon an elephant,
and the elephant rested upon a tortoise;
and when they said, "How about the tortoise?"
the Indian said, "Suppose we change the subject."
만약 모든 것이 원인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 하나님도 원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원인 없이 어떤 것이 있을 수가 있다면
하나님처럼 세계도 원인 없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런 타당성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세계는 코끼리의 잔등에 얹혀 있었으며,
코끼리는 거북의 잔등에 얹혀 있었다는 힌두교도의 생각과 꼭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거북은 어떻게 되었소?” 하면,
그 인도인은 “화제를 바꿔 봅시다”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The argument is really no better than that.
There is no reason
why the world could not have come into being without a cause;
nor, on the other hand,
is there any reason why it should not have always existed.
There is no reason to suppose that the world had a beginning at all.
The idea that things must have a beginning
is really due to the poverty of our imagination.
Therefore, perhaps,
I need not waste any more time upon the argument about the First Cause.
제 1원인에 의한 증명법도 정말 그 얘기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세계가 원인 없이 생겨나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세계가 반드시 존재했다고 할 수 없는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세계는 그 시초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사물은 시초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사실은 우리의 상상력의 빈곤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1원인에 의한 증명법에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으리라고 봅니다.
 
 

The Natural-Law Argument
자연법칙에 의한 증명법
 
Then there is a very common argument from Natural Law.
That was a favorite argument all through the eighteenth century,
especially under the influence of Sir Isaac Newton and his cosmogony.
People observed the planets going around the sun
according to the law of gravitation,
and the thought that God had given a behest to these planets
to move in a particular fashion, and that was why they did so.
다음에 자연법칙에서 나온 아주 흔한 증명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18세기 전체를 통해서, 특히 아이잭 뉴튼 경과
그의 우주론의 영향을 받아 유행한 증명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유성이 인력의 법칙에 의해서 태양의 주위를 운행하는 것을 관측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신이 이 유성들에게 특정한 양식으로 운행하도록 명령하였으며,
바로 이 명령 때문에 유성들이 그렇게 운행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That was, of course, a convenient and simple explanation
that saved them the trouble of looking
any further for any explanation of the law of gravitation.
Nowadays we explain the law of gravitation
in a somewhat complicated fashion that Einstein has introduced.
I do not propose to give you a lecture on the law of gravitation,
as interpreted by Einstein, because that again would take some time;
at any rate, you no longer have the sort of Natural Law
that you had in the Newtonian system,
where, for some reason that nobody could understand,
nature behaved in a uniform fashion.
물론 이것은 편리하고 단순한 설명으로서,
그들에게서 인력의 법칙에 대한 설명을 더 이상 추구할 수고를 덜어 주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아인슈타인이 소개한
좀 더 복잡한 방식으로 인력의 법칙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인슈타인이 해석한 인력의 법칙에 대한 강의를
여러분에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뉴튼의 세계에서 보던 그런 자연법칙은 이미 볼 수 없습니다마는
이 뉴튼 법칙에 의하면,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르지만,
자연은 똑같은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것이었습니다.
 
We now find that a great many things
we thought were Natural Laws are really human conventions.
You know that even in the remotest depth of stellar space
there are still three feet to a yard.
That is, no doubt, a very remarkable fact,
but you would hardly call it a law of nature.
오늘날 우리는 과거에 우리가 자연법칙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실은 인간의 관습임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은 우주공간의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똑같이 1야드는 3피트임을 알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중요한 사실입니다만,
여러분은 이것을 자연법칙이라고는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And a great many things
that have been regarded as laws of nature are of that kind.
On the other hand, where you can get down
to any knowledge of what atoms actually do,
you will find they are much less subject to law than people thought,
and the laws at which you arrive are statistical averages of just the sort
that would emerge from chance.
지금까지 자연법칙으로 생각되던 것 중에는 이런 종류의 것이 매우 많습니다.
그 반면에 여러분이 원자가 실제 어떠한 일을 하는가를 알아보려고 하면,
원자들은 우리가 생각하던 것보다는 훨씬 법칙에 좌우됨이 적으며,
찾을 수 있는 법칙이란
결국 우연히 생길 있는 그런 종류의 통계학적 평균치임을 알게 됩니다.


There is, as we all know, a law that says
if you throw dice you will get double sixes only about once in thirty-six times,
and we do not regard that as evidence to the contrary
that the fall of the dice is regulated by design;
on the contrary, if the double sixes came every time
we should think that there was design.
The laws of nature are of that sort as regards to a great many of them.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두개의 주사위를 던질
36회에 단 한 번씩 쌍육이 나온다는 법칙이 있습니다마는,
우리는 그것을 주사위가 하느님의 뜻에 의하여 구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만약에 주사위가 번번이 쌍육이 나온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자연법칙에는 이런 종류의 것이 많습니다.


They are statistical averages such as would emerge from the laws of chance;
and that makes the whole business of natural law
much less impressive than it formerly was.
Quite apart from that, which represents the momentary state of science
that may change tomorrow,
the whole idea that natural laws imply a lawgiver is due to a confusion
between natural and human laws.
법칙들은 우연의 법칙에서 나올 수 있는 그러한 통계학적 평균치입니다.
이로 인하여 자연법칙에 의해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과거보다는 훨씬 그 감동이 적어졌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내일이라도 변할지 모르는 과학의 일시적 관계를 대변하는 것이므로,
이와 같은 일을 아주 떠나서 보더라도
자연법칙이 다른 법칙의 모체라는 생각은
자연법칙과 인간법칙을 혼동함으로써 생기는 것입니다.


Human laws are behests commanding you to behave a certain way,
in which you may choose to behave, or you may choose not to behave;
but natural laws are a description of how things do in fact behave,
and being a mere description of what they in fact do,
you cannot argue that there must be supposedly someone
who told them to do that, because even supposing there were,
you are faced with the question,
"Why did god issue just those and no others?"
If you say that he did it simply from his own good pleasure,
and without any reason,
you then find that there is something which is not subject to law,
and so your train of natural law is interrupted.
인간법칙은 여러분에게 어떻게 활동하라고 가르치는 명령이며,
이대로 여러분은 행동할 수도 있고 행동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자연법칙이란 사물들이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기술하는 것이며
이러한 것이 실제 어떤 일을 하는가에 대한 단순한 기술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런 일을 하도록 가르친 자가 반드시 있으리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자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에 곧 부딪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하느님은 왜 그러한 자연법칙은 만들고
다른 법칙들은 만들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하느님의 단순한 기분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을 뿐
다른 이유가 없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것은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며,
결국 자연법칙의 일관성은 깨지고 마는 것입니다.


If you say, as more orthodox theologians do,
that in all the laws which God issues
he had a reason for giving those laws rather than others
-- the reason, of course, being to create the best universe,
although you would never think it to look at it --
if there were a reason for the laws which God gave,
then God himself was subject to law,
and therefore you do not get any advantage
by introducing God as an intermediary.
You really have a law outside and anterior to the divine edicts,
and God does not serve your purpose, as he is not the ultimate lawgiver.
만일 비교적 많은 정통파의 신학자들이 말하듯
하느님은 다른 법칙보다 자기가 제정한
모든 그 법칙들을 만드신 것이 이유가 있었다고 하면
즉 하느님이 만든 법칙에는 어떤 이유가 실제 있었다고 한다면,
그때는 하느님 그 자신이 그 법칙의 지배를 받는 셈이 되며,
따라서 하느님을 중간에 개입시켜 보았자 아무런 유리한 입장에 서지 못합니다.
사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신성한 명령 이외에 또는 이전에 어떤 법칙을 가지고 있으며,
하느님은 여러분의 목적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궁극적인 법칙 제정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In short, this whole argument from natural law
no longer has anything like the strength that it used to have.
I am traveling on in time in my review of these arguments.
The arguments that are used for the existence of God
change their character as time goes on.
They were at first hard intellectual arguments
embodying certain quite definite fallacies.
As we come to modern times they become less respectable intellectually
and more and more affected by a kind of moralizing vagueness.
간단히 요약하면 이 자연법칙에 의한 증명법은
전체가 이미 과거와 같은 힘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이 증명법들을 검토하는, 적절한 시기에 삶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한 이 증명법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성격도 변하고 있습니다.
이 증명법들은 아주 명백한 어떤 오류들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처음에는 꺾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접어들면서 이 증명법들은 지적으로 덜 숭상 받게 되었으며,
점점 더 일종의 도덕적인 장막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The Argument from Design
목적론적 증명법

The next step in the process brings us to the argument from design.
You all know the argument from design:
everything in the world is made just so that we can manage to live in the world,
and if the world was ever so little different, we could not manage to live in it.
That is the argument from design.
이 과정에 있어서의 다음 단계는 목적론에 의한 증명법이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다 아실 줄 믿습니다만,
목적론에 의한 증명법이란 세상을 살아 나가기에 꼭 알맞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이며,
만약에 조금이라도 다르다면 우리는 이 세계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적론에 의한 증명법입니다만,
이 증명법은 흔히 이상한 모양을 지니고 나옵니다.

It sometimes takes a rather curious form; for instance,
it is argued that rabbits have white tails in order to be easy to shoot.
I do not know how rabbits would view that application.
It is an easy argument to parody.
You all know Voltaire's remark, that obviously
the nose was designed to be such as to fit spectacles.
That sort of parody has turned out to be not nearly so wide of the mark
as it might have seemed in the eighteenth century,
because since the time of Darwin we understand much better
why living creatures are adapted to their environment.
It is not that their environment was made to be suitable to them,
but that they grew to be suitable to it, that is the basis of adaptation.
There is no evidence of design about it.
예를 들면 토끼는 총을 쏘기에 좋도록 흰 꼬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합니다.
이러한 의견의 적용을 토끼는 어떻게 생각할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재담거리가 되기 쉬운 증명법입니다.
코는 안경을 끼기에 알맞도록 만들어졌다는 볼테르의 말을 다 아시지요.
이러한 재담은 18세기에는 엉뚱한 논리로 들렸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은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다윈 이후로 우리는
생물이 왜 주위 환경에 적응하게 되는가를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환경이 생물에 적합하도록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생물이 환경에 적응하여 갔기 때문이며, 이것이 적응의 기본 원리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목적론적인 증거도 없습니다.

When you come to look into this argument from design,
it is a most astonishing thing that people can believe that this world,
with all the things that are in it, with all its defects,
should be the best that omnipotence and omniscience
have been able to produce in millions of years.
I really cannot believe it.
이 목적론에 의한 증명법의 내용을 조사해 볼 때 놀라운 일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그 속에 사는 삼라만상과 그 많은 결함들을 보면서도
전지전능의 신이 수백년 걸려서 만들어 놓은 최선의 것이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 믿을 수가 없습니다.

Do you think that, if you were granted omnipotence and omniscience
and millions of years in which to perfect your world,
you could produce nothing better than the Ku Klux Klan or the fascists?
Moreover, if you accept the ordinary laws of science,
you have to suppose that human life
and life in general on this planet will die out in due course:
it is a stage in the decay of the solar system;
at a certain stage of decay you get the sort of conditions
and temperature and so forth which are suitable to protoplasm,
and there is life for a short time in the life of the whole solar system.
You see in the moon the sort of thing to which the earth is tending
-- something dead, cold, and lifeless.
여러분이 만약에 전지전능과,
당신의 세상을 완성하기 위해 수백만년이라는 시일을 받는다면
쿠 클럭스 클랜이나 파시스트 같은 것밖에 못 만드실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또 과학의 일반법칙을 인정하신다면
이 지구상의 인간의 생명과 전생명체가 때가 오면 다 죽어 없어질 것입니다.
그것은 태양계가 몰락하는 한 단계입니다.
몰락의 어느 단계에 가서는 원형질에 적당한 온도 조건 같은 것을 가지게 되며,
전태양계에 잠시 동안 생명이 존재하게 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달에서 지구가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일종의 죽음, 냉기, 무생명 등의 그 무엇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
쿠 클럭스 클랜 : 1915년에 조직된 미국 국수주의자들이 비밀 조직
 
I am told that that sort of view is depressing,
and people will sometimes tell you that if they believed that,
they would not be able to go on living.
Do not believe it; it is all nonsense.
Nobody really worries about what is going to happen millions of years hence.
Even if they think they are worrying much about that,
they are really deceiving themselves.
They are worried about something much more mundane,
or it may merely be bad digestion;
but nobody is really seriously rendered unhappy by the thought of something
that is going to happen in this world millions and millions of years hence.
이런 의견은 사람들의 마음을 암담하게 만든다는 말을 듣기도 하고,
또 그런 것을 믿고서야 어떻게 살아가겠느냐고 하는 사람들도 가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말은 곧이 듣지 마십시오. 그것은 모두 무의미한 말들인 것입니다.
수백만 년 후에 일어날 일 때문에 정말 걱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설령 그 일 때문에 자기가 걱정하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실상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훨씬 계속적인 어떤 일은 걱정하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단순한 소화불량일는지도 모릅니다.
수백만 년 이후에 이 세상에서 일어날 어떤 일을 생각해서
정말로 심각하게 불행해지는 아무도 사람은 없습니다.
Therefore, although it is of course a gloomy view to suppose